본문 바로가기

encyclopedia/ㅊ

창(무기)

반응형
SMALL

창(무기)

최근 수정 시각: 

1. 개요2창술3. 역사4. 가공 매체에서의 창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길다란 장대 끝에 뾰족한 끝이 있어, 휘두르고 찌르고 던지는 게 가능한 병기. 보통 길이에 따라서 단창, 장창으로 구분한다. 동양에서는 일반적인 단창이나 장창 이외에 당파와 낭선 등이 쓰였으며 그 외에 서구에는 장창 이상으로 길이를 늘린 파이크나 사리사, 기병돌격에 최적화된 랜스가 있다. 그 외에 던지는 용도로 제작한 투창이 있다. 그외에 찌르는것에 집중하지 않고 휘두르는 것도 감안한 무기에 대해서는 폴암 참조.

사용법을 익히기 쉽고, 공급이 용이하였기 때문에 세계 어디에서나 인간은 창을 수렵 및 전투무기로 사용했다. 다만 대양에 고립되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부메랑이 먼저 개발되었기 때문에 석창이 수렵, 전투용 병기로 사용된 시점이 상당히 늦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만 하더라도 사냥꾼이 창을 가지고 다녔고 보어스피어와 같이 서양에도 사냥창은 존재했다. 이후 싸움의 규모가 국가대 국가단위의 전쟁으로 커져가면서 창은 수렵무기에서 전쟁무기로 위치를 바꾸었고 창대 창의 거리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점점 길어지다 장창이 등장하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pikepikepikeee.jpg
장창과 폴암의 예시

창은 기본적으로 끝부분에 있는 창날을 사용한 찌르는 무기지만 창의 자루 부분을 타격 병기로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며 제대로 타격했을 때의 위력도 생각보다 뛰어나다. 쇳덩이가 달린 막대기를 전력으로 휘두르면 타격무기로 충분하다. 이로 인해 중국의 경우 봉술과 창술의 발달이 유사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본질은 찌르는 병기라 가까운 거리에서의 교전시 불리함이 있다. 찌르기도 힘들고 타격을 하려고해도 원심력을 살리지 못해 위력이 급감한다. 특히 멀리서 찌르는 것에 집중하느라 길이를 최대한 늘린 장창의 경우 접근을 허용하면 과 같은 단병을 사용하는 상대에게 취약했다. 때문에 근접전을 보완하며 길이의 이점을 적당하게 살리기 위해 장창에 비해 길이를 짧게 만든 단창이나 창날의 형태에 대형날을 추가한 폴암의 형태로 변형되기도 하였다. 다만 폴암 사용시 일반적인 창에 비해 짧은 사거리 때문에 대규모 교전시 정작 창에게 밀리기 때문에 장창병을 추가로 무장시켜 대처하였다. 보통 징집병이 아닌 제대로 된 부대의 장창병들은 언제나 창의 보조 무기로 검, 도끼, 둔기, 단창 등의 단병을 휴대하여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이를 사용하여 교전했다.

파일:external/pds20.egloos.com/e0097032_4c09eaf892c6f.jpg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9058da4de716f0ff58d325681678516.jpg
창벽의 대명사인 팔랑크스

창의 길이가 4미터쯤에 이르면 끝이 흔들거리는데다 무게중심 때문에 강하게 찔러도 명중율이 낮다고 한다. 다만 윗 사진의 팔랑크스의 경우와 같이 많은 밀집된 인원들이 빽빽하게 창을 세워 두면 명중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매우 위협적이다. 팔랑크스는 보통 밀집 대형으로 포진하여 방패로 자신과 옆 사람의 몸을 방어해주고 창으로는 앞의 적을 찌르는 식으로 운용되었기에, 아무리 몸놀림이 잽싼 사람이 첫번째 창 공격을 피한들 다른 창들이 연이어 날아들어 자신을 꼬치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피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그렇기에 창으로 만들어진 방진은 매우 강력했고 창이 길수록 상대의 방진을 부수기 쉬웠기 때문에 길이가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밀집 대형의 특성상 방향 전환과 돌격 등을 통한 기동력을 사실상 포기한 대가로 기병이나 경무장 보병 등 여타 기동력 있는 병종에 비해 동일한 면적 안에 공격 가능한 인원을 더 많이 편성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고대의 전장에서 팔랑크스와 같은 형태의 장창 방진 부대는 전장이 좁아 기동할 공간이 없거나 지형의 제약으로 오로지 정면으로만 부딪혀야 하는, 방진이 깨지기 힘든 상황에서는 무적에 가까웠다. 

실제 역사에서도 제대로 짜여진 장창 방진은 정면에서 정공법으로 부수기엔 너무나도 강력하여 로마의 레기온조차도 팔랑크스를 불리한 지형으로 유인해내고 지형 때문에 팔랑크스의 진열이 깨진 틈을 타고 들어가서야 격파해낸 피드나 전투 정도가 유일한 격파사례이며, 검병으로 유명한 스페인 로델레로도 검병만으론 장창 방진을 깨지 못했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검병만으로 제대로 장창방진을 이룬 창병을 상대할수 있었던 경우는 당시에 혁명적으로 유기적인 전술이 가능하였던 레기온을 운영한 로마를 제외하고는 없다. 파비아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을 끝장낸, 양손검으로 잘 알려진 란츠크네흐트도 주력은 장창병이었고 스페인의 총병이 방진끼리의 격돌중에 지원을 와서 쐐기를 박지 않았으면 전투의 결과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력함과 제작의 간단함, 다른 무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빠르게 숙달될 수 있다는 여러 장점 덕분에 유사 이래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창을 주요 전쟁무기로 사용하였다.

보통의 일반적인 근접전에선 적당히 짧은 창이 다루기 쉽기에 더 선호된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단창이 폴암의 형태로 변형하여 장창의 보완을 하는 양식으로 진화하였지만 제작의 용이성으로 인하여 단창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의례용이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던 도검에 비하여 간지가 떨어지기 때문에 주인공의 무기로 사용하긴 애매하여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등에서는 도검에 비해 지분이 낮다.

창은 일반적으로 검보다 제작단가가 싸고 제작하기가 매우 쉽다. 언뜻 보기엔 검이 더 쉽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돌칼 수준의 단검이 아닌 통짜 금속으로 제작된 제대로 된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꽤 높은 수준의 제철기술과 주조기술을 필요로 한다. 반면 창은 굳이 금속이 아니어도 적당한 길이의 날카로운 무언가만 충족되면 되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살상효과를 가질 수 있다. 일례로 죽창과 같이 대나무를 끝부분만 뾰족하게 자르더라도 방어구를 무장하지 않은 사람의 몸을 꿰뚫을 만한 창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고, 조금 더 공을 들여 주변의 뾰족한 돌을 막대기의 끝에 줄로 묶기만 해도 완성된다. 또한 금속으로 만들더라도 창날에만 철을 투자하면 되는 탓에 검을 하나 만들 분량으로 창을 두세 개는 만들 수 있어 중요한 자원인 철을 아낄 수 있었으며 이는 유사 이래로 화약 병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창이 전장의 주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화약병기가 등장한 이후에도 보조를 위해 전장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나 화약병기의 발달로 전장에서 퇴출되고 총구 끝에 대검을 달아 만든 총검의 형태로 전장에 남아있게 되었다.

또한 검술과 창술 중 무엇이 더 나은가를 따진다면 군사용으로 도태되면서 창술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이래 일상용 및 범용성으론 당연히 검술의 압승이다. 검과 검술은 중세 서양에서 기본무술로 익힐 정도로 범용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다만 이것은 검과 검술이 검집만 허벅지에 매달아 운신에 불편함이 없이 양손을 얼마든지 사용할수있는 은닉과 휴대의 용이성으로 전쟁병기가 아닌 일상에 가까운 호신병기의 느낌을 가지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다. 반면 창의 경우 휴대하려면 반드시 한손에 살상무기인 창을 들고 다니거나 등 뒤에 사선으로 매야 하는데, 이것은 창의 휴대성에 악영향을 미쳤다. 또 어떻게 휴대한다 하더라도 살상무기인 창을 대놓고 보여준다는 것은 위협용이지 도저히 호신용으로 볼 수 없었기도 했다. 거기에 검으로 찌르기도 가능하기에 검술에 찌르기가 들어가 있어 창술에도 통용이 가능하다는 것과 장창을 이용한 창술은 창이 전쟁의 주역이었던 만큼 군인이 아닌 자가 함부로 훈련하면 역적 취급 받기 쉬웠기에 발달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해야 하는데 권총과 소총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렇기에 전장에서 창이 사라진 순간 창술도 일본의 고류무술쪽을 제외하면 사실상 맥이 끊겼다. 단 단창을 이용한 창술은 사용법이 유사한 스몰소드에서 영향을 받아 발달하였기에 유사하게 발달한 총검술의 형태로나마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창병도 보조무기로 검을 사용했으니 검술이 주로 발달하는 것이 당연한 것. 따라서 개인이 사용하는 창술은 찌르기에 특화되었던 스몰소드 검법에서 발달하거나 창날을 떼어내 위험성을 줄여 군사훈련 같지 않고 장거리 여행시 호신용 무기 및 지팡이 대용으로 사용이 가능하며 특성이 유사한 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군사용으론 병진운용과 진법에 특화되었다.

장창을 이용한 창술이 역적의심을 불러일으킨 이유로는 검병 같은 경우 방패와 함께 하거나 플레이트 메일로 방어력을 보충하면 창병보다 특정부분 강력하고 거의 모든 방면에서 대응할 수 있지만 제대로 다루려면 전문적인 훈련과정을 통한 지속적인 숙련이 필요하여 병사 하나하나가 매우 비싸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레기온이나 에스파냐의 로델레로들이, 그리고 조선의 팽배수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반면 창은 농민을 징집하여 장창을 쥐어주고 찌르기 훈련 몇 번하고 줄을 세운 뒤 탈영을 막기 위해 독전관을 세우면 일단 장창방진이 완성된다. 훈련기간이 검에 비해 매우 짧고 쉽게 병력이 충원되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창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한다는 것은 군대를 일으킨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주체가 일반사람들 다수가 아닌 주무기로 다루는 군대이거나 용병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높으신 분들이면 예외다. 

파일:external/www.romeacrosseurope.com/phalanx.jpg
깨진 팔랑크스를 파고드는 로마군

창은 검에 비해 인지도가 낮고 인기가 없기에 부각되지 않지만 장점이 많은 만큼 단점도 많다. 그래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여러 노력을 시행했는데 일단 길기에 검처럼 일상적으로 들고 다니기도 힘들기에 사용할 일이 없으면 놓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내구도 면에서 통짜 쇳덩이인 검보다는 약했는데 보통 창촉을 제외한 잡는 부분은 보통 싸게 만들면 목재로 만들어 통짜 철보다는 쉽게 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으며 쉽게 잘리지 않게 만들어지기는 하나 재질이 재질이니 만큼 검보다는 잦은 교체를 필요로 해 손잡이 까지 통짜로 철로 만들어 지거나 일본과 같이 대나무를 겹쳐서 보강하는 개량을 시행해야 하였다. 무엇보다 창의 치명적인 단점은 창은 장병기이기에 상대가 창날 안쪽으로 들어오는 전투시에 매우 약하다. 평범하게 검과 창의 파괴력을 따지면 리치가 긴 창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만 방패를 앞세워 창날 안쪽으로 달려드는 적을 접근하기 전에 제압하는 것은 창을 휘둘러서 타격해서 유효하게 막아내기엔 비좁은 전장환경에서 길이 때문에 휘두르기 어려운 창으로선 충분한 저지력을 발휘하기 매우 힘들었다. 환경 때문에 충분한 저지력을 가지지 못한 창을 방패로 막아내고 접근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집단 운용을 통해 적이 파고들 공간 자체를 줄이는 전술을 사용했고, 방패를 착용해 틈을 막아버리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극대화시킨 것이 팔랑크스. 여기에 방패를 줄이거나 버리고 화력을 늘려버린게 장창방진이다. 그러나 집단 운용시에도 진형이 붕괴되면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한번 적이 파고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무너지는 단점은 여전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피드나 전투와 같은 사례가 있었고 창을 걸어서 방진을 열고 들어가기 위한 무기들도 발명되었다. 따라서 아예 적이 창날 안쪽으로 들어오면 창을 버리고 보조 무기를 사용하거나, 폴암의 형태로 발달하여 최대한 근접에 대한 보완을 하였고 장창방진과 기동부대를 거의 반드시 같이 운용하였다. 다만 장창 방진을 파고들 정도로 고도로 훈련된 검병이면 창병이 사용하는 보조무기는 최후의 발악이나 견제 시간벌이 정도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37
충분한 공간을 가진 창을 비롯한 장병기의 우위(좌)[1][2]

접근을 허용했을 때 장병기에 대한 단병의 우위(우)[3]

위의 상황과 같이 충분한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의 창을 비롯한 장병기는 위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기사 계급의 부흥과 제철기술의 발달이 불러온 후기형 사슬갑옷과 트랜지셔널 아머의 등장은 일반 보병의 찌르기 정도로는 도저히 관통되기 어려운 방어력 강화를 만들어내어 접근하기전에 처리가 매우 힘들어 지게 되었다. 이렇게 방패가 창을 이긴상황이 도래하자 이러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창은 이 일반적으로 뚫기힘든 강철에 둘러쌓인 인간병기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전의 마상창을 개량하여 말에 타서 질량에 운동량을 더해 관통해버리는 헤비 랜스나 찌르기외에 휘두르기를 위한 뽀족한 촉을 끝부분에 달아 폴암으로의 형태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후 보병은 폴암을 사용하고 기병은 랜스나 기병창으로 갑옷을 온몸에 둘러싼 기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마상창의 경우 일단 말을 타야하는 사용법상 사용상 난이성이 높았기에 방어력이 강화된 이 시기에는 장병기의 이점을 가지면서 갑옷을 관통하여 타격을 입힐수 있는 만능형 폴암을 상당수의 국가들이 채용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오는 이미지 때문에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많은 경비병들이 보통 할버드를 들고 있다.

파일:external/crossfireamersfoort.files.wordpress.com/nrdlingenterciotorralto.jpg
창으로 총병을 보조하는 테르시오 진형의 모습

그 후 테르시오의 등장으로 장창이 총병의 보조 병과로 전쟁 전면에 나오면서 다시 창병의 중요성이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화약무기의 지속적인 발달로 테르시오로 대표대던 장창기반의 밀집방진을 잡기위해 선형진(Line formation)이 나타나고 장창 방진은 날이 갈수록 사거리와 위력이 강해지는 대포로 인하여 도태되게 되었다. 선형진의 개발 이후 보병의 기본무기로 창이 아닌 총기가 지급됐으며, 시간이 지나 창의 역할을 대부분 대신해줄 수 있는 총검의 개발로 전장에서 보병이 사용하는 전투용 창은 완전히 사라진다. 반면 카라콜로 한번 망했던 기병의 트랜드의 변화로 기병용 병기로서는 장점이 남아있어 더 오랫동안 쓰이긴 했다. 이후 창은 주력무기로서의 위치는 상실하고 의장용이나 사냥용으로 주요 용도가 변화하게 되었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총검의 형태로만 남아있게 된다.

창에서 파생되었지만 복잡한 특성을 가지게 된 빌이나 폴액스, 할버드 등의 바리에이션은 폴암항목 참조. 폴암과 유사한 동양의 병기는  참조.

참고로 총안법에서 창은 도검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일부 폴암도 마찬가지. 사실 형법 등에서는 도검류에 무기가 될만한 날붙이 전반을 집어넣는다.

2. 창술[편집]

항목 참조.

3. 역사[편집]

3.1. 유럽[편집]

창으로 무장한 채 밀집대형으로 시위만 해도 상대가 접근하기 전에 공격하기에도 용이한 방어력 높은 구성을 짤 수 있었다. 이는 그리스 시대에 와서 팔랑크스라는 진형으로 완성된다. 롱 스피어의 장점인 길이를 최대한 늘린 사리사라는 장창이 등장하면서 상대의 접근조차 불허하는 단단한 진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창의 특성상 길이가 길어질수록, 무게가 급증하고 다루기도 힘들어졌으며 정면을 제외한 측면과 후면을 들이치는 근접전에 대응하기도 힘들었고 진형이 깨질시 너무나도 취약하게 되었다. 때문에 험악한 지형으로 인해 진형이 깨진 틈을 비집어들어온 검을 들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로마군의 레기온에 그리스의 팔랑크스는 무너지고 동부 지중해는 로마 군의 손에 떨어진다. 물론 이 단점은 팔랑크스를 운용하는 국가들은 다 알고있었으나 로마가 떠오르는 샛별인 반면 그리스측이 막장일로 였기에 생겼던일임은 감안해야한다. 자세한건 피드나 전투참조.

고대 로마 말기 이후 동로마 제국과 그 근방을 제외하고 유럽에서는 중세 초까지는 로마수준으로 대규모 전투병을 유지하는 국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형식의 팔랑크스는 사라지게 된다. 물론 로마의 레기온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편제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고 짧은 창을 이용한 창병진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이후 기사계급의 발호와 제철 기술의 발달로 갑옷이 발달하면서 검으로는 갑옷을 뚫지 못하자 창에서 분화된 폴암류의 복합 날을 가진 무기들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중세의 무장 중 하나인 할버드와 폴액스이다.

그러나 스위스군이 고대에 이어 다시금 대형 장창인 파이크를 장비하게 되면서 기사계급의 주력이었고 중세 가장 강력한 병종이었던 기병에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창은 다시금 과거의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고, 화약무기의 개발로 주 무기가 화기인 총으로 변해갈 때 테르시오전술의 주축으로서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차지하게 된다. 로크루아 전투이때의 창은 과거의 주력 병기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장전속도가 느린 초기형 총병을 엄호하기위한 공격력을 가진 질량 벽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다.

18세기에 이르면 총의 성능향상과 대포의 발달로 인해 밀집대형이 자살행위가 되어버리고, 총을 이용한 라인배틀이 주류가 되면서 주무기로써의 쓰임새가 다했다. 19세기경까지 부사관의 지휘용/상징용 무기로 스펀툰이라는 단창이 남아있긴 했으나, 19세기 말이 되면 그마저도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총검을 단창의 연장으로 본다면, 창은 보조 무기로나마 전장에서 남아있게 되었고 앞으로도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군용 깃대 끝에 장식용으로 창날을 달아두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한때 창이 군용무기로 쓰였다는 흔적은 아마 오래도록 군대에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3.2. 중국[편집]

영어로 쓰면 여전히 spear지만(병음으로 qiang이라고 쓰기도 한다), 무기의 분류법인 창 외에도 창(槍)이라고 불린 무기가 따로 존재했다. 즉 보다 큰 집합의 창과 그 안에 든 창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은 창(槍), 조선은 궁(弓), 일본은 (刀)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3국 모두 창을 정규편제로 사용하였고 분화가 세세하게 이루어졌을 정도로 창은 매우 각광을 받은 무기였다. 그리고 창이 저리 각광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창의 장점인 가격과 숙련의 용이성으로 인한 물량과 유교적 병농일치제에서 나오는 인구수의 조합 때문. 특히 중국은 워낙 인구수가 방대하여 창의 발달이 다른 국가들 보다 뛰어났는데 병농일치제로 서양과 비교할수 없는 수준의 징집병 물량을 뽑아내려다 보면 창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징집병이 아닌 숙련병은 검을 중시하긴 하였는지 한나라시대 때 양손 검술이 융성했고 이는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져 당태종은 1000명의 검사들을 휘하에 두었다고 한다.근데 이들의 양손검이라는 검의 검신 길이가 87cm가 약간 못 되어서 서양의 롱소드에 비하면 좀 짧았다고 한다.

최초 제작자는 촉한의 제갈량이라고 하나 정작 제갈량 등장 이전에도 찌르는 용도의 무기는 엄청 많이 있으므로 제갈량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좀 있다. 상기에서 말한 큰 집합의 창보다는 그 분류 하의 창이라고 하는 무기의 종류를 제작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제갈량이 발명자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긴 나무 자루 끝에 작은 날붙이를 단다는 개념은 날붙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나면 사거리의 연장을 꾀하기 위해 매우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중국에서도 이런 개념으로 맨 처음 만들어진 찍는 꺾창(戈)이 있고, 이건 최소 상나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유물이 발견되고, 찌르는 투겁창인 가 동주 시대에 유물이 있고, 본디는 슴베창을 특칭하던 槍은 전국시대 말에는 이미 등장했다.

창이 특히 발달했던 중국의 창은 기본적으로 긴 막대 끝에 나뭇잎 모양의 창날과 창날 밑에 영이라 불린 붉은색의 끈 묶음이 있다. 이 끈 묶음이야말로 중국 창만의 특징이라 할 만한데, 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세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적을 찔렀을 때 그 사람의 피가 손잡이를 타고 내려와서 손을 미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간단한 장식이라는 설, 세번째는 칭기즈 칸이 서방 원정시에 적의 머리를 잘라서 창 끝에 매달아서 용맹을 과시한 것이 영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칭기즈 칸이 생각 외로 빨리죽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짧기에 세번째는 별 의미없어 보인다.

그리고 실제 창을 사용시의 효과를 보면 아마도 1번과 2번의 이유가 모두 맞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이 qiang은 최고급 목재로 만들어서 세게 휘두르면 탄성을 받아 휘는데, 고수가 창을 휘두를 때 창날의 이런 기동과 영의 시야 방해 효과가 겹치면 적은 지금 창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저 적을 견제 하기위해 창끝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리기만 해도 눈길을 끄는 특유의 붉은 영 덕분에 적의 집중을 상당히 흐트리게도 할 수 있다.

창의 뒷면에는 창준(槍鐏 / Spear tail)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말뚝이 있다. 이는 창을 지면에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하거나 창날로 인해 생기는 무게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용했고, 창날이 부러질 경우 임시방편으로 쓰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유사하게 그리스의 팔랑크스가 사용했던 사리사에도 달려 있었다. 다만 사리사는 지면에 고정시키기보다는 팔랑크스를 유지하며 들고 찌르는데 필요한 무게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끝에 무게추 달았다. 민간용 창은 보통 준이 달려 있지 않다.

길이는 상당히 다양하나 최소한 사용자 보다는 길어야 한다. 그러나 너무 길면 기동성이 떨어지니 사용자의 세배[4]가 넘는 길이는 안 된다는 중국 장병기의 원칙이 있었다. 단창을 제하면 2미터 이하는 없고 오히려 그 아래면 창을 쓰는 의미가 없다. 

창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철창(鐵槍)이라는 것도 존재하였다. 나무를 전혀 쓰지 않고 모조리 로 만든 것으로, 당연히 속은 비어있지만 철이 다보니 자루가 손상될 염려가 적고 타격 무기로도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공격력은 크게 상승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무거워 다루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널리 쓰이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창이 전장에서 도태되면서 실전형 창술이 사라진것은 서양뿐이 아닌지라 남아있는것은 민간의 물건들인데 이로 인해 대단히 섬세하고 오묘해 숙달하려면 긴 기간이 필요한 창과 창술이 남아 있다. 쿵후나 우슈에서 사용하는 창은 백낙곤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무협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창이 이것이다.

한편 중국은 화창의 영향인지 총(銃)이란 한자가 있음에도 총기류를 창(槍)이라 적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권총을 수창(手槍)이라 부르거나 기관총을 기관창이라고 표기한다. 건슬링거 걸을 신창소녀神槍少女라고 번역하기도.

3.3. 대한민국[편집]

조선 왕조 이전 고대에는 옥저 병사들이 창술에 능했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쓰인 창은 매우 크고 아름다워 한 사람이 쓰기에는 힘들고 두 명 이상이 함께 썼다고 한다.

삼국통일전쟁 말기에 일어난 나당전쟁에서 매소성 전투 때 역시 신라의 장창병이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a0101184_496e395d2579d.jpg
안압지 출토 쇠창.출처 서양의 할버드와 비슷하게 생겼다. 해당 유물은 드라마 해신에서 신라군 창으로도 나온 바 있고, 비슷한 유물이 개성에서 출토된 적도 있다. (북한에선 철검이라고 한다.)

조선의《무예도보통지》에서는 24기 중 창법이 첫번째로 소개된다. '장창이 무예의 왕이다'라는 구절도 적혀 있으며, 무예가들 사이에서도 '천 번 내려치는 것이 한 번 찌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찌르는 것은 베는 것보다 빠르게 가능하며 힘을 집중하기에 좋다. 편곤도 사실상 조선 창기병이 멸종된 상황에서 숙련이 쉬우며 강력하여 기병의 장병기로 들어온 것이지 멀리서 찌르는것의 강력함은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한 군관이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을 받아 창술의 기록을 남겼고, 훗날 스스로 연구하여 독자적인 세법을 추가하였다고 한다. 이중 명에서 배운 것이 12세, 스스로 깨우친 것이 12세로 모두 합쳐서 장창 24세라고 부른다.

파일:창석반.jpg

창 날 밑에 칼코등이 석반이 뚜렷하게 보인다.

한국의 장창이 중국의 장창과 다른 점은 혈조가 있고 날 아래에 석반이 있다는 점 등이다. 특히 석반을 날카롭게 갈아서 적이 자루를 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준은 거의 예외없이 달려있다. 길이는 1장 5척으로 3미터가 조금 넘는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에서 삼지창의 일종인 당파가 도입되었는데 사극의 포졸들이 들고 나오는 바로 그 물건으로[5] 장창과는 다른 운용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곁가지를 이용해 적의 무기를 걸어 재껴 적의 장병기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주 용도였다. 길이는 7척 정도로 장창의 절반 길이였는데 길이가 너무 길 경우 적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무기를 막아낼려면 최전선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용도에 맞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력과 담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한 화전을 비롯한 화약무기를 발사할 때 받침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날 사이에 발사체를 끼우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죽장창의 길이는 2장으로 4미터를 훨씬 넘는 통대나무에 얇은 칼날을 달아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강도가 약한 단점이 있지만 길이가 길고 탄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기창[6]은 지휘용, 의전용으로서의 무기이지만 24기 중 하나에 속하며 세법이 따로 존재한다. 기창을 하나의 무기체계로 인정한 것도 조선군만의 특성. 물론 실제 전장에서 활용될 기회는 적었다.

《무예도보통지》에 따르면 2.5미터 정도의 창의 무게가 2.5 Kg라고 한다. 또한 창자루의 재질로는 척계광의 기록을 인용해 조목(稠木, 치밀하고 단단한 나무)이 제일이고, 합목(合木, 여러 나무를 합친 것(참조))이 그 다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4. 일본[편집]

일본식 창은 '야리(槍)'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야리 문서 참고.

4. 가공 매체에서의 창[편집]

5.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68번째 버전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1] 처음에 장병기가 횡으로 휘두르는 것도 동일한 목표를 노렸으나 방패든 사람이 피하고 파고들었고 그것을 종으로 내려찍어서 마무리.[2] 더 빨리 파고들면 회피가능성이 있어보이나 내려찍는 순간에 프레임이 늘어나는 바람에 속도가 느려보여서 그렇지 못피할 속도로 내려찍었다.[3] 날 안쪽의 막대를 속도가 붙기전에 칼로 막아 내려치는것을 막고 접근.[4] 6척(180cm) 기준4.5m. 서양 장창과 길이가 비슷하다.[5] 물론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삼지창은 있었다. 초기 철기시대부터 유물이 나온다.[6] 깃발 달린 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LIST